찻잔 속에서 살갑게 말 거는 태극기
휘청거릴 것 같던 미국이 여전히 잘 나간다. 비교적 공평한 기회, 엉뚱한 창의적 시도마저 존중해 주는 풍토가 바탕이다. 현재 미국의 10대 부자들 대부분은 당대에 부를 일군 이들이라고 한다. 시대를 읽는 눈과 실력으로 억만장자가 된 과정의 공통점이 눈에 띈다. 성공한 부자들에게 환호한다면 미국인, 왠지 거부감을 보인다면 한국인일 개연성이 높다. 부를 이룬 과정과 번 돈을 쓰는 모습에서 감정의 차이는 벌어지게 마련이다. 부자에게 품는 기대가 그들의 행동과 균형을 이룬다면 존경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반대의 경우라면 당연한 비난과 불신의 눈총을 보내야 옳다. 성공의 기회가 누구에게나 정당하고 공평하게 펼쳐져야 좋은 나라다. 미국이 최강국으로 행세하는 바탕을 도덕성에서 찾는 이가 많다. ‘아이리버’ 디자인한 김영세가 보여주는 한국적 디자인 미국식 가치의 실천으로 성공한 이가 이노(INNO) 디자인의 김영세다. ‘세계적인 산업디자이너’라는 수사가 공허하지 않다. 한때 전 세계 젊은이들이 열광했던 MP3 플레이어 ‘아이리버’를 디자인한 주인공이다. 세계의 굵직한 디자인 상을 거머쥔 성과도 빼놓을 수 없다. 한국의 디자인이 주변 역할을 넘어 중심으로 다가서게 한 공로도 그의 몫이다. 멋진 성과를 남긴 이유에는 귀 기울여야 한다. 디지털 시대를 겪어본 사람은 아무도 없다. 누구나 똑같은 출발선에 있다는 말이다. 문화적 전통의 고리도 약해졌다. 과거에 없던 새로움에 반응하게 된 이유다. 김영세는 스스로 기회를 만들고 혁신의 노력을 더해 ‘이노베이터’가 되었다. 새로운 디자인에 세상이 반응했고 성공은 절로 찾아왔다. 성공의 현재는 속물적 기준의 잣대로 파악해야 실감난다. 바로 옆자리에서 확인할 기회가 생겼다. 격조의 승용차 벤츠 마이바흐에 동석한 영광이다. 널찍한 차는 마음껏 다리를 뻗어도 앞자리와 닿지 않았다. 차 속에서 들은 성공 비결은 결국 기회를 놓치지 않은 실천역량이었다. 정당한 성공의 과실에는 배 아파하지 말아야 한다. 속 모르고 사람 끌어내리는 하향 평준의 위안은 얄팍하고 씁쓸하다. 김영세는 세계에 통용되는 한국의 디자인을 보여주었다. 우선 스티브 잡스마저 당혹스럽게 했다는 MP3 플레이어와 가로 회전형 삼성 휴대폰이 떠오른다. LG 냉장고, 이동용 개스 버너, 전동 드릴에 이르는 생활용품들도 디자인했다. 디자인 혁신의 대상은 생활의 전 영역에 걸쳐 있다. 작업은 미국 실리콘 밸리와 분당 두 곳에 있는 이노 디자인에서 진행된다. 최근 용산 국립중앙박물관과 연결된 통로인 나들길을 걸어 보았는지, 광명시의 명물이 된 붉은색 쓰레기 소각장은? 밖으로 나다닐 시간이 없었다면 조선호텔에 묵거나 집기를 본 적은 있는지. 이들 공공장소와 공간 인테리어는 디자이너 김영세의 다른 면을 확인할 수 있는 곳이다. 이제 이노 디자인은 공공시설 프로젝트와 공간디자인 영역까지 범위를 넓히고 있다. “세상을 아름답게 바꾸려는 온갖 노력이 곧 디자인이다”는 말은 이노 디자인의 영역이 우리 삶의 전반으로 확장될 것임을 일러준다. 나의 관심은 이노가 디자인한 ‘물건’에 더 쏠려있다. 이노 디자인이란 이름값만으로 주목도는 높아진다. 제품엔 모두 ‘디자인 바이 김영세’가 찍혀있다. 디자이너 이름을 브랜드화하려는 의도가 읽혀진다. 대단한 자신감이거나 현시욕의 단면임을 알겠다. 지금까지 디자이너가 누구인지는 관심 있는 이들만의 이야깃거리로 충분했다. 써놓지 않아도 다 아는 김영세의 존재감은 이름의 남발로 외려 옅어지지 않을까. 순환·영원 상징하는 태극 문양 세련된 감각으로 녹여 최근 이노 디자인은 자체 브랜드 상품들을 만들기 시작했다. 디자인과 생산, 유통의 전 영역으로 확장된 변화다. 헤드폰, 블루투스 스피커 같은 스마트용품부터 가방·지갑·수첩·필기구·그릇·액세서리 같은 소품과 여행용품, 안경에 이른다. 대중적 취향의 상품 구성이다. 성격이 다른 물건들을 서로 꿰는 디자인 콘셉트가 필요해졌다. 이노의 제품에 태극기 문양이 들어가게 된 이유다. 십여 년 전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인상적인 모습과 마주쳤다. 성조기를 모티브로 한 옷과 생활용품을 아무렇지도 않게 입고 쓰는 사람들이다. 심지어 발싸개도 있었다. 우리식 기준이라면 국기 모독이라며 펄쩍 뛸 불경스러움이다. 그들은 “왜 안되냐?”고 반문했다. 나라가 개인의 발마저 감싸주는 자상하고 친근한 상징적 모습에 나는 큰 충격을 받았다. 우리의 태극기도 이렇게 다가오길 진심으로 기대했었다. 근엄한 거리감 대신 부드럽고 가깝게 느껴지는 나라에 더 살가움을 느끼게 마련이다. 우리의 태극기는 그동안 표정없는 노인처럼 무거웠다. 친숙하고 만만하게 여겨졌던 사건이 드물게 있긴 했다. 2002년 월드컵 응원 현장의 태극 머리띠나 패션 디자이너 옷에 새겨진 태극 문양과 색채의 기억이다. 이것만으론 모자란다. 태극기에서 뽑아낼 정신과 형태가 많다면 일상의 물건에 쓰지못할 이유가 없다. 국가에 대한 자부심이 넘쳐야 사랑도 우러난다. 이노 디자인 또한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한 듯하다. 우연의 일치다. T 라인은 태극기의 머리글자에서 따와 이름지었다. 태극기가 생활 속에 파고들어 친숙하게 다가오길 바라는 마음을 담았을 것이다. 태극기에서 차용된 형태는 생각보다 다양했다. 순환의 영원을 상징하는 태극 문양은 세련된 형태와 감각으로 녹여졌다. 해와 달, 땅과 사람을 뜻하는 직선의 건곤감리(乾坤坎離) 4궤는 디자인 모티브로 활용된다. 누구나 떠올렸을 법한 생각을 실천해 완성한 디자인은 아름다웠다. T 라인은 미국 애크미 스튜디오의 상품에도 채택됐다. 전세계 유명 아티스트와 디자이너의 작품들만으로 이루어진 애크미다. 세련된 기품으로 마무리된 태극 문양 그릇과 찻잔이 마음에 쏙 든다. 평소 흘려버렸던 태극기의 조형성에 디자이너의 감성이 더해져 근사하게 태어났다. 감탄은 이어진다. 제대로 알지 못했던 국기의 상징과 형태는 다채로운 표정으로 살아난다. 이토록 많은 이야기와 조형요소는 얼마든지 다양하게 적용할 수 있을 법 하다. 보기만 해도 좋은 찻잔과 그릇은 일상의 시간을 풍요롭게 만든다. 퍼즐을 맞추듯 건곤감리 4궤의 의미를 떠올려본다. 인간과 우주의 합일을 꾀했던 상생의 원리는 지금도 유용하다. 그릇의 바깥에 둘러진 태극은 꼬리가 머리이고 머리가 꼬리가 되는 순환의 질서를 일깨워준다. 멀리 있는 태극기는 펄럭이기만 할 뿐 의미까지 전달해 주진 못했다. 체온이 묻어 따뜻해진 찻잔 속 태극기는 살갑게 말을 걸어오기 시작했다. 디자인의 위력이다. 태극기를 보며 아쉬워했던 내 생각을 구체화 시켜준 이에게 감사의 마음을 보내야 예의다. 디자인된 물건의 가치를 알리고 사랑해 주는 일만 남았다. 한국의 아름다움이 세계에서 통용된다면 얼마나 신나는 일인가. 뛰어난 디자이너의 역할이 점점 중요해진다. 디자인은 저절로 판독되는 감각의 언어이기 때문이다. 이제 곧 아름다움이 권력을 지니는 시대가 온다. 아름다움엔 경계가 없다. 큰 것과 작은 것, 고정된 것과 움직이는 것, 남자와 여자, 낡음과 새로움 …. 대립된 내용의 사이쯤에 새로운 아름다움이 깃들어 있을지 모른다. 모두 이노베이터가 되어 아름다움을 찾아내고 써먹는 권력을 누려야 잘 사는 모습이다. 윤광준 글 쓰는 사진가. 일상의 소소함에서 재미와 가치를 찾고, 좋은 것을 볼 줄 아는 안목이 즐거운 삶의 바탕이란 지론을 펼치고 있다. 윤광준 / 사진가태극기 찻잔 한국적 디자인 디자인 혁신 디자이너 김영세